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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북

지퍼와 지포

20세기를 뒤흔든 10대 발명품 가운데서 지퍼는 좀 특이한 이유로 선정되었습니다. 지퍼가 등장해서 옷 벗기기가 쉬워짐으로써 인류의 성 개방을 촉진하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던가. 어쨌든 인류의 성문화를 개선(?)한 지퍼가 데뷔전을 치른 첫 무대 역시 다름 아닌 1차 대전입니다.

 

기데온 선드백이 개량한 지퍼의 도안

 

 

갈고리와 구멍의 조합을 직선으로 잇는다는 지퍼의 기본기는 생각보다 일찍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중세시대에 지금의 지퍼와 아주 비슷한 고문도구가 있었던 것처럼 단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게 문제였지만요.

 

1890년대에 지퍼와 관련된 첫 특허가 인정되지만, 이때의 지퍼는 구두끈을 대신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졌고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그 후 지퍼의 특허는 여러 사람을 전전하다가 1917년 미국 기술자 기데온 선드백의 손에서 좀 더 작고 쓸 만한 형태로 개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드백이 만든 지퍼를 최초로 주문한 고객이 바로 미군이었죠.

 

미군은 이 지퍼를 항공대 항공대 조종사들을 위한 구급용품을 담는 주머니에 달았다고 합니다. 또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조종복과 조끼에도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전히 1차 대전은 단추와 끈으로 결속되는 구식 군복의 전쟁이었지만 미 육군이 양키다운 실험 정신으로 1차 대전 참전 기회를 준 지퍼는 이후 단추의 끈을 몰아내고 인류 성문화를 뒤흔들게 만들었죠. 

 

지포

지포라는 이름은 1920년대에 지퍼를 채울 때 나오는 의성어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1차 대전을 통해 알게 모르게 데뷔한 지퍼는 1920년을 지나 1930년대에 이르면 세상을 뒤흔들어 버리는 발명품이 됩니다. 1930년대 조지 브라이스델이 새로운 라이터를 만들면서 자기 라이터가 대박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 당대를 뒤흔들던 발명품 지퍼의 이름을 본떠 지포(zippo)라고 이름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지포 라이터는 1차 대전 이후에 태어난 물건이지만 그 배경에는 1차 대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브라이스델은 바람에는 강하지만 뚜껑이 분리되어 있어 불편했던 오스트리아제 방풍 라이터를 본체와 뚜껑을 연결해서 지포 라이터를 만들었는데 브라이스가 원형으로 삼은 오스트리아제 방풍 라이터가 바로 1차 대전 참호에서 불 밝히며 작전 뛰던 관록의 노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지포 라이터의 명성은 불붙이는 도구로 쌓아온 것이 아니라 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병사들이 라이터에 새겨 넣은 각종 그림과 문구로 시작된 것입니다. 병사들 스스로 또는 누군가에게 의뢰하여 탄생시킨 전장의 지포는 오늘날에도 하나의 수집품으로 명품 반열에 올라 있는데 라이터에 그림이나 문구를 새겨 넣는 행위 자체를 '트렌치 아트'라 하니 이것 역시 1차 대전의 유산입니다.

 

전투기보다는 폭격기에 노즈 아트가 번성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기동하기보다는 어딘가에 고립되어 공격을 견뎌내야 하는 전선에서 아트가 꽃피고 1차 대전 참호야말로 바로 그런 곳의 원조였습니다. 참호 생활 자체도 지옥이지만 언젠가 호각 소리와 함께 참호를 벗어나는 순간, 보다 하드코어 한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병사들은 그 긴장감을 트렌치 아트로 바꿔 냈고 그 전통이 지포 라이터로 이어져 세기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주었습니다.